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 시벨리우스 (문단 편집) == 절필에 대해 ==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시벨리우스는 1930년 이후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곡을 발표하지 않다시피 했는데, 그가 왜 작곡을 중단했는지는 아직도 논란거리이다. 소나타 형식을 능가하는 자신만의 형식을 만들고자 했으나 한계에 부딪혀 작곡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연금만으로도 생활이 안정되자 작곡을 그만두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가장 대표적인 설로는 말년에 들어서 성격이 내성적으로 변한데다가, 결정적으로 자기 작품에 대한 자신감도 줄어 창작 의욕이 감퇴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가설은 '당시 급변하던 음악계의 격랑에 시벨리우스가 따라가지를 못해서'라는 설명이 뒷받침한다. 실제로도 [[클로드 드뷔시]], [[모리스 라벨]],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구스타프 말러]], [[아르놀트 쇤베르크]], [[세사르 프랑크]], [[에릭 사티]], [[파울 힌데미트]], [[벨라 바르톡]] 등 오늘날 20세기 초중반을 대표하는 것으로 알려진 음악가들의 음악과 시벨리우스의 후기 낭만파적, 국민악파적 음악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시벨리우스는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유치찬란하다고 맹비난한 바 있다고 한다. 스트라빈스키 역시 앙심이 남았던 모양인지, 시벨리우스가 죽었을 때 애도의 메시지를 남길 생각이 없냐는 질문에 딱 잘라 거절했다.] 시벨리우스와 그나마 비슷한 성향을 보인 음악가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정도지만, 라흐마니노프는 후기 낭만파라는 공통점은 있어도 시벨리우스와는 색채가 다른 편이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20세기 대편성 관현악의 대가로서 상당히 혁신적인 음악을 다수 작곡했다는 점에서는 [[구스타프 말러]]와 비슷하다. 한편으로, 시벨리우스는 급변하는 조류들을 이끄는 음악가들을 부러워하기도 한 듯하다. 자신의 일기에 '''"누구나 다 혁신적인 천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라고 쓴 것을 보면, 역으로 늙은 자신은 이제 시대를 선도하는 천재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한탄한 것으로 보인다. 시벨리우스가 장수한 것도 있지만, 똑같이 장수했으며 후기 낭만파에서 출발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창작 성향이 시대를 따라 변화해 간 것을 보면, 확실히 시벨리우스는 20세기 초중반에 태동하기 시작한 현대음악과는 성향도 맞지 않았고, 따라가 보려고 해도 순탄치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사실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제8번>은 작곡되어지지 않은게 아니라 여러 증언을 보건대 시벨리우스가 작곡을 했는데 없애버린 것에 가깝다. 62세 생일을 지나고 두 달 남짓 지난 1928년 2월, 시벨리우스는 베를린 여행 중 부인 아이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교향곡 8번>이 될 '새 작품'에 대해 언급했다. "이 작품은 멋진 것이 될 거요. 오래 걸리겠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지." 이해 여름에는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도 "새 작품을 쓰고 있어. 미국에 보낼 거야. 오래 걸리겠지만 좋은 작품이 될 거야." 라고 썼다. 그가 시사한대로 작업 속도는 느렸다. 9월에는 원고 일부를 악보 정리원에게 보냈다. 작곡가는 "전체 원고는 (보낸 원고의) 여덟 배 정도 길이가 될 거요"라고 알렸다. 그러나 이후 이 작품의 진척은 무한정 지연된다. 아마도 이 시점, 즉 1933년 말에서 1934년 사이에, 거의 완성된 새 교향곡의 운명에 알 수 없는 위기가 닥쳤을 것이다. 특히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전설적인 상임 지휘자이자 시벨리우스 스페셜리스트로 유명했던 세르게이 쿠세비츠키[* 1874~1951, [[러시아계 미국인]]으로 유럽에서 미국에 건너가 성공한 첫 번째 지휘자겸 20세기 초반 미국 지휘계의 전설로 통하는 거장이다. 유럽 악단에서 지휘자로 활약하였고, 1924년부터 보스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지냈다. 쿠세비츠키 - 피에르 몽퇴 - 샤를 문쉬 - 에리히 라인스도르프로 이어지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황금기를 연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레너드 번스타인]]을 비롯하여 사뮤엘 에들러, 사라하 캐드웰 등 당대의 지휘자겸 작곡가를 양성하는데도 큰 공헌을 세웠다. 쿠세비츠키는 유진 올만디 이전에 미국에서 시벨리우스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의 권위자로 평가받았으며, [[베토벤]], [[멘델스존]], [[프로코피에프]], 스트라빈스키, 라벨, 드뷔시 등의 권위자로 평가받았고, 주로 고전낭만주의풍의 지휘의 표본을 보여주었던 지휘자로 평가받고 있다. 탱글우드 음악센터에서는 쿠세비츠키상을 재정하여 젊은 지휘자들에게 수여하고 있다.]는 1930년부터 32년까지 시벨리우스에게 8번 교향곡이 언제 완성되느냐고 들들 볶았다. 실제로 시벨리우스는 8번 교향곡을 완성하려고 시도했고, 쿠세비츠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교향곡의 저작권 문제를 걱정할 정도였다. 31년에는 베를린에 다녀온 후에 새 교향곡을 32년 봄에 연주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이 정보가 새서 보스턴 언론에서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그 소식을 접한 시벨리우스는 공황상태에 빠졌고 8번을 만들려던 생각을 접은 것으로 보였다. 1943년 초 이제 78세가 된 시벨리우스는 비서에게 말했다. "죽기 전에 거대한 작품을 마치고 싶다. 그런데 전쟁의 비인간성이 나의 작업을 방해한다. 전쟁을 생각할 때마다 밤에 잠을 이룰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말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시벨리우스가 80세 생일을 맞이할 해가 밝았다. 결국 8월에 시벨리우스는 얄라스에게 "나는 <교향곡 8번>을 여러 차례 완성했고, 한 번은 태워 버리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그의 긴 창작상의 침묵이 마지막 교향곡에 모든 힘을 쏟아 넣었기 때문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성된 이 작품을 파기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시드니 대학교 역사학 교수이자 문화평론가인 마크 맥케나는 "시벨리우스는 만년에 자기 자신의 기념비이자 핀란드 공화국의 상징물, 박물관 관리자로 역할을 마쳤다"고 말했다. 혹여 자신이 세워 둔 영광에 흠집이 갈 수 있는 행위는 (신작 발표를 포함해) 할 수 없었고,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시벨리우스의 딸인 카타리나의 회상과도 상응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나이와 더불어 한층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하며, 지금가지의 작품보다 나은 곡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교향곡은 그에게 '짐'이 되었다. 언제 작품을 내놓을 수 있을지 아버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또한 시벨리우스는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을 몹시 부담스러워했는데, 핀란드의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은 것은 물론 미국에서도 열광적인 인기를 얻게 되자, 이것이 되려 창작의지를 꺾어버린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미국에서의 시벨리우스의 인기는 비유하자면 스타의 인기만큼이나 대단한 것이었고, 시벨리우스의 교향곡은 여러 오케스트라들에서 단골로 연주할 정도였다. 얼마나 연주가 많았는지 영화 "[[로라(영화)|로라]]"에서 [[데이너 앤드루스]]가 연기한 탐정 왈, "그들은 연주 직전에 프로그램을 바꿔서 '''오직 시벨리우스만''' 연주했다구요!"라는 대사가 나왔을 정도다. 앞서 언급한 세르게이 쿠세비츠키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첫 전성기를 이끌면서 시벨리우스 교향곡 전곡을 연주했을 정도였다. 이런 미국의 시벨리우스 인기에는 난해한 현대음악[* 물론 [[리게티 죄르지]], [[존 케이지]],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올리비에 메시앙]], [[피에르 불레즈]],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 같은 전후(戰後)의 진짜 난해한 음악들에 비하면 이 시대의 난해한 음악이라고 해야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아르놀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 정도였지만, 후기 낭만파의 음악어법에 익숙한 대중들에게는 이런 음악도 충분히 당황스럽게 들렸을 것이다. 사실 쇤베르크 일파의 무조음악은 현대의 청중이 듣기에도 난해하다.]에 대한 반동적인 성격도 어느 정도 있었다. 이를 간파한 (말러 - 쇤베르크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시벨리우스 음악이 훌륭한 음악이면 음악의 표준을 바꿔야 된다"라고 맹비난했기 때문에 시벨리우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사람들도 "이렇게 맹비난하면 욕만 먹을 뿐이니 수위 좀 낮추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이처럼 1930년대 이후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시벨리우스의 인기는 높아졌지만, 반면 '시대의 발전을 놓친 퇴행적 작곡가'라는 악평도 커졌다. 이런 폭력적인 악평들 때문인지 시벨리우스의 다른 지인들도 그가 나이 들수록 민감해져 갔으며 사소한 비판에도 괴로워했다고 전한다. 작곡계는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창시한 12음 기법이나 스트라빈스키의 야수주의, 즉물적 신고전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도 시대와 순조롭게 지내기 힘들었을 시대에 그는 오히려 극도로 민감해져 있었다.[* 출처 <클래식, 비밀과 거짓말>] 따라서 그가 실제로 만년에 창작을 안했다기보단 이 시기에도 창작을 하긴 했는데 스스로 만족할 수 없어서 이 시기 창작된 작품들을 스스로 없애버렸다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 듯하다. 대표적인 예로 시벨리우스의 아내 아이노의 회고에 의하면 1940년대 초에 시벨리우스가 갑자기 카렐리아 모음곡의 일부를 비롯한 다수의 악보들을 마당으로 들고 나가서는 불싸질러 버렸다고 한다. 시벨리우스 본인의 증언까지 감안해 본다면 이때 교향곡 8번을 비롯한 다수의 작품들이 아깝게도 잿더미가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시벨리우스의 창작 중단에는 20세기 현대음악의 조류에 대한 갈등, 미국의 엄청난(지나친) 인기에서 비롯된 고뇌가 가장 중심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물론 시벨리우스 자신이 침묵한 탓에 정확한 진상이야 알 수 없겠지만 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